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43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3)

youtu.be/F-q0Hk_prrM 〈총동원된 독일군 기만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6월 6일 새벽 3시에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세르부르 반도 남동쪽의 후미진 곳인 이지니를 공습했는데 이것 역시 사상 최대의 위장 작전이었다. 공습은 3명의 낙하산병, 수백 개의 모조 폭탄, 매연을 뿜는 매연탄, 총성과 병사들의 고함, 군화발 소리 등이 녹음된 축음기와 증폭기 한 대 등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위장화력이 독일군 352사단 916 보병 연대를 본래의 위치에서 오마하 해변까지 물러서게 만들었다. 연합군에서 사용한 속임수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보다 확실하게 상륙지점이 파드칼레 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잠수함과 소해정, 수뢰정 등을 고의적으로 파드칼레 근처에 출현하도록 했고 전투기들로 하여금 그 곳 해..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2)

youtu.be/9_YISSJx87Y 롬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영국과 미국이 아프리카 전선의 중요성을 깨닫고 막대한 물량과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롬멜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엘아라마인에 도착하지만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은 몽고메리인데 1942년 10월 전투에서 롬멜은 몽고메리의 연합군에 대패한다. 이 패배로 아프리카 전선의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가는데 롬멜은 베를린에 계속 병력과 전차, 군수품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오는 답신은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무조건 결사항전하라’였다. 당시 히틀러는 소련 전선의 늪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 여력도 없었다. 한마디로 히틀러가 롬멜을 ..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1)

youtu.be/HTAZJ-cYk4M 발키리 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암살 시도에 참여하여 처형된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르빈 롬멜 원수다. 일부 학자들은 롬멜 원수가 억울하게 반나치에 동조했다는 누명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하지만 롬멜이 의심을 받을 일을 한 것은 틀림없다. 우선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은 롬멜 장군의 부관이었으므로 끈끈한 연계가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가장 유명한 독일군 원수 중 한 명이다. 에르빈 롬멜은 1891년 11월 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덴하임안데어브렌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3남1녀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으..

발키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3)

youtu.be/wfoYq-698hk 히틀러가 ‘배신자’들을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자 나치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을 곧바로 열었다. 반란자들 대부분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거의 대부분 신속하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약 7,000명 또는 자료에 따라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이 중 약 5,000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들 대부분 교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히틀러가 그들 모습을 보고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묘사했을 정도다. 당시 처형된 저명인사 및 군 장성, 고관들이 워낙 많지만 폰 슈타우펜베르그의 친형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전직 법학대학원 교수로 해군에 몸담고 있었는데 벨트 없는 누더기를 입은 상태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재판장에..

발키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2)

youtu.be/ZRS-awfJiCU 작전명을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로 부르는 것은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할 당시, ‘독일예비군모집책(German Reserve Army's Valkyrie)’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직책을 이용해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였으므로, 이것을 ‘발키리 작전’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히틀러를 ‘오딘’, 퇴역한 군인은 전쟁 영웅으로 비유하고,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을 오딘과 영웅을 연결해 주는 ‘발키리’로 묘사한 것이다. 발키리 작전은 매우 세심하게 진행된다. 원래는 1944년 7월 15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 하에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

발키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1)

youtu.be/0ExsB4Do0fE 2019년 7월 20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발키리’ 거사 75주기를 맞아 독일 베를린의 ‘벤들러블록’에서, 거사에 가담했다가 희생된 이들을 추모했다. 메르켈 총리는 ‘희생자들은 우리가 극우 극단주의, 반(反)유대주의, 인종주의와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히틀러의 제3제국의 실상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제3제국 즉 히틀러의 나치 통치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일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탄생했지만 그로 인해 홀로코스트 등 수많은 문제점이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전횡을 막아야한다는 것은 많은 독일인들도 갖고 있었는데 그중 잘 알려진 내용이 암살사건이다. 그를 향한 암살 사건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5)

youtu.be/qxC80k216ZE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산업국이 참가하자 점점 패망의 길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코 항복할 수 없다며 1944년 3월 19일, 독일로 통하는 모든 수송로, 차량, 다리, 댐, 공장 그리고 군수품을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국가도 역시 멸망한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가장 원시적인 생존의 기초조차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그것마저도 파괴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우리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국가가 허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미래는 오직 승리자의 것이다. 그 외에도, 전투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가치한 사람들이다.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은 다..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4)

youtu.be/klQUd1IfqHY 히틀러로서는 반 데르 루베가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처형되었다는 증거만 있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국회의사당 방화는 나치가 방화에 가담했다는데 비중을 둔다. 그러나 근래의 자료에 의하면 반 데르 루베의 단독 범행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루베는 나치를 괴롭히기 위해 베를린에서 몇 차례 소규모 방화를 저지른 경력이 있었다. 특히 검찰에서 루베의 동조자로 체포되었던 불가리아 공산당원과 독일의회 공산당 지도자가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만약 나치가 방화를 계획했다면 혐의자 전원에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방화범인 루베가 1934년 1월에 처형되자 히틀러가 사실상..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3)

youtu.be/3RwWZ1bIGNU 1923년, 히틀러는 자신이 봉기할 지역으로 뮌헨을 선택했고 11월 11일을 D-Day로 잡았다. 그 날은 휴전 즉 독일이 모욕적인 패망한 5주년이었다. 히틀러는 바바리아 출신 장교 중에서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 서약을 무시하고 있던 로소브 장군, 계엄사령관 폰 카르 대령, 경찰국장 폰자이서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들이 집회에 함께 모이는 11월 11일을 택했다. 히틀러의 원래 계획은 11월 10일 저녁 어둠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뮌헨 북부에 있는 프뢰트마닝 들판에서 대규모 야간연습을 실시하고 다음날 새벽에 보통 행진하듯이 뮌헨으로 들어와서 민족주의 독재체제를 선포하고 3거두에게 행동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초 예상한 11월 11일보..

아돌프 히틀러의 전말(2)

youtu.be/RMttH7UQUCs 여하튼 1913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제국군(히틀러는 태어날 때 오스트리아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음)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빈을 떠나 뮌헨으로 갔다. 그런데 1914년 1월 18일 오후에 놀랍게도 형사가 그곳에 나타나서 체포했고, 다음날 그를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당면한 죄목은 무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이 그를 도왔다. 린츠 병무당국이 출두날짜를 너무 짧게 잡아서 그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었다. 소환날짜가 연기되면서 그는 세심하게 계산된 서면상의 사유서를 제출했다. 그는 소환장에서 자신을 예술화가라고 적은 것에 대해 정당한 지칭이기는 하지만 수입은 별 것 없어 독립적 예술 화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최초의 징집기한을 놓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