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 158

나치의 생체실험(6)

youtu.be/5EE7GsgQ2VM 전쟁이 끝난 후 뉴른베르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각종 범죄에 12건의 재판이 벌어졌는데 그중 많은 관심도를 보인 것이 ‘의사 재판(醫師裁判, Doctors' trial)’이다. 공식적으로는 아메리카 합중국 대 카를 브란트 외 판례라고 한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의료에 관한 사람들이 별도로 재판받은 것은 재판 자체가 단순히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만을 하는 게 아니라 반인륜 행위를 저지른 범죄집단을 국제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에서 인체실험들을 수행한 사람들만 재판에 선 것은 아니다. 당대의 자료에 의하면 무려 350여 명에 이르는 의사, 연구자, 지도적 위치에 있던 교수나 과학자들이 독일군의 건강과 ..

나치의 생체실험(5)

youtu.be/TGkGVXtsVp0 멩겔레가 보다 유명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가 전설이기 때문이다. 생체실험 등으로 악명을 높인 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프하르트 등은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멩겔레는 운 좋게 빠져나갔다. 우선 그의 도주 과정이 마치 소설과 다름없다. 그는 가장 중요한 전범 체포리스트에 올랐는데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소장이 수용 캠프에 도착하지 않아 석방되었고 고향인 군쯔베르그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다른 SS와 달리 문신을 하지 않았고, 아우슈비츠를 나온 후 6주간 국방군 병원으로 들어가 잠시 군의관 행세를 했으므로 어느 누구도 SS 장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소속 의사들이 1946년 12월,..

나치의 생체실험(4)

youtu.be/mf6CvXQQbtg 멩겔레의 생체실험은 제목만 거론해도 엄청난 분량이 되지만 그가 연구한 것 중에는 삐뚤어진 과학적인 발상에서 출발한 것도 많이 있다. 단적인 예로 당시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수암’이라는 질병이다. 그가 수암의 직접적인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 질병이 영양실조 등으로 면역체계가 무너진 아이들에게 주로 발병해 홍역과 결핵 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암에 대한 연구를 나무랄 것은 아니다. 그런데 멩겔레가 수암을 연구한 것은 수암이 인종적 열성요소 때문에 발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 결론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충동적인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그에게 남다른 취미가 있는데 어느 날은 안경 쓴 사람..

나치의 생체실험(3)

youtu.be/dtb7opfKaXc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적어도 150만 명 이상 살해되었다고 알려지지만 이들 모두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유대인이 약 3분의 1, 나머지는 폴란드인, 집시, 동성연애자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을 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7,6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가 유대인 등 포로들을 독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했다는 것으로 세계를 경악시켰지만 더욱 사람들을 전율케 만든 것은 생체실험이었다. 의 홍대길 기자는 이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나치의 생체실험(2)

youtu.be/DdYCdAtIZMs 나치가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 때문에 우생학이 나치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지지만 우생학은 나치가 태어나기 전인 1883년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33)이 창시한 학문이다. 그는 1874년 ‘본성과 양육’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윈의 진화론은 예기치 않은 파장을 일으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진화론이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우생학(優生學, eugenics) 분야다. 우생학은 인류사에 지우기 힘든 흔적을 남겼는데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촉발된 적자생존 이론은 사회개혁가였던 허버트 스펜서..

나치의 생체실험(1)

youtu.be/kEFrl_OT0dE 2010년에 개봉된 「언피니시드(The Debt)」는 매우 특별한 주제를 다룬다. ‘1965년, 모사드는 동베를린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나찌 전범 디이터 포겔을 찾아낸다. 그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비르케나우의 외과의사’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통해 어린이를 포함한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인 전범이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포겔을 예루살렘 법정에 세우기 위한 비밀 공작팀을 동베를린으로 보낸다. 레이첼, 데이빗, 슈테판으로 짜인 3인조 공작팀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포겔을 납치했지만 그를 동베를린에서 예루살렘으로 빼돌리는 데는 실패하고, 포켈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달아난다. 그런데 공작원 세 사람은 포겔을 사살하여 암매장했다고 상부에..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독가스실(2)

youtu.be/OV2_UeG-Auk 아우슈비츠가 악명높은 것은 바로 가스실을 사용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수용소는 살해대상들을 깨끗하게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수사했다.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의 문제점은 전쟁 중이라 귀중한 탄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처형에 동원된 장병 역시 독일인 이전에 인간이므로 처형후 스트레스 등을 겪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신속하고 문제점이 다소 작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바로 가스를 사용한 집단처형 장치이다. 1942년 6월, 헤움노 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SS대령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독가스실(1)

youtu.be/kUopcluIXk4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가스실을 운용하여 사상 최악의 장소로 변모하게 만든 장본인은 하인리히 히믈러이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소련군 포로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지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곳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비르케나우 즉 실제로 가스실이 있었던 장소에 죄수들로 하여금 거대한 제2단지를 세웠다. 대다수 소련군 포로들이 사망하자 악명 높은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럽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장소로 결정했다. 아우슈비츠에 독일이 점령한 각지로부터 유대인이 실려 오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특히 게쉬타포에게 붙잡힌 유대인들은 곧바로 아우슈비츠로 향했으며 대부분이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행했다...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2)

youtu.be/khUvVIqgyf4 〈유대인들의 피해〉 나치는 유대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천명했지만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는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죽음의 수용소는 유대인 학살을 용이하게 만든 방법인 동시에 그들의 돈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들은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빼앗겼다. 우선 강제 수용소의 하급 경비원과 카포라는 ‘모범수’로 구성된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소지품을 조사한다. 유대인 가운데는 토지와 가옥의 몰수를 예상하고 재산 모두를 보석으로 바꿔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몰수된 귀중품은 수용소 본부의 특별위원에게 넘겨지고 전문가에 의해 선별된다. 유대인이 좋아하는 금시계나 백금시계, 다이아몬드나 ..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1)

youtu.be/LCVeEAQD8r4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이지만 나치 독일에서 운용한 수용소는 이곳뿐이 아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라면 아우슈비츠를 꼽는 이유는 당대 가장 큰 수용소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홀로코스트 설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기반으로 설명한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지 얼마 안 되는 1940년 6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이다. 당초 지명은 유대어로 '손님'이란 뜻의 오시피친(Oshpitzin)에서 유래됐다. 800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유대인들과 인연이 깊다. 16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술을 빚고 옷을 만들어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