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89

조선 왕릉 답사 (29) : 제2구역 서오릉(8)

https://youtu.be/XcvucqDcRC0 윤씨가 폐비되자 그야말로 진행된 내용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당시 둘째 대군을 낳은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손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결국 5일 뒤 사망한다. 그런데도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이후 윤씨가 사사되는데 대부분의 사극 등을 보면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대의 정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학자들은 성종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한다.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

조선 왕릉 답사 (28) : 제2구역 서오릉(7)

https://youtu.be/TzpMrdIaqyY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의 며느리인 윤비(尹妃)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은 적장자인 연산군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인수대비와 윤비는 물과 기름사이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대비는 남다른 지식인이지만 윤비(尹妃)는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조선 왕릉 답사 (27) : 제2구역 서오릉(6)

https://youtu.be/d28N3Nl6sKs ② 경릉 경릉은 추존왕 덕종(1438〜1457) 및 소혜왕후 한씨 즉 성종의 모친(1437〜1504)의 묘이다. 덕종은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의경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사망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지만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정난공신1등에 오른 한확의 딸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 즉 인수대비가 되었다. 각종 드라마에서 단골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수대비가 바로 소혜왕후다. 세조3년(1457) 본래 병약했던 남편이 사망하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였다..

조선 왕릉 답사 (26) : 제2구역 서오릉(5)

https://youtu.be/G7E_xCUpo_c 다소 정리하여 설명하면 장희빈 사건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지지자들이 두 왕비를 둘러싸고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우선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 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거세게 벌였다. 여기에서 숙종의 처신이 중요한 변수인데 놀랍게도 숙종이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고 숙종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장희빈을 재단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한마디로 숙종이 서인들의 권력에 의심을 가지면서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 세력을 우대했으나 권세를 잡은 남인들도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권력을 행사하자 이를 제거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조선 왕릉 답사 (25) : 제2구역 서오릉(4)

https://youtu.be/ahVwjZadjpA 조선조에서 내용은 어떻든 중전 폐출에 대한 민심이 나빠질수 밖에 없는데 숙종은 이를 숙종답게 처리했다. 인현왕후가 쫒겨난 지 5년 만인 1694년 숙종은 대대적인 정계개편에 돌입한 것이다. 숙종은 조선의 권력이 또 하나의 붕당에 의해 잠식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특유의 국면 전환카드를 준비한 것이다. 우선 자신이 본의 아니게 인현왕후를 쫓아내었다며 철저하게 오리발내밀었다. 한마디로 인현왕후를 몰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들을 퇴출시키고 그녀를 지키려다 화를 당한 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사전 정치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사랑을 표명했다. 한마디로 왕으로서 신망이 떨어진..

조선 왕릉 답사 (24) : 제2구역 서오릉(3)

https://youtu.be/DSjBQu7JFCA 숙종의 반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689년 1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겠다고 밝힌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아들이 태어난 지 단 4개월 후다. 원자는 상속권, 즉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다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서인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서인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앞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조선 왕릉 답사 (23) : 제2구역 서오릉(2)

https://youtu.be/u5Es37SpIyI 장희빈은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가장 논쟁이 뜨거운데 이는 그처럼 다룰 수 있는 많은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쟁적인 인물은 진면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과장과 포장이 난무하며 더불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조선 숙종 때에 펼쳐진 격렬한 당쟁 한복판에 있었다. 당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이 핵심인데 특히 서인, 그 가운데서도 노론은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그들의 큰 스승 송시열 등이 장희빈의 왕비 책봉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 김향은 『악녀의 세계사』에서 역사적으로 악녀라 불리는 42명을 ..

조선 왕릉 답사 (22) : 제2구역 서오릉(1)

https://youtu.be/FFKmP-GSuZ4 조선왕릉의 제1구역인 서울시 동북쪽을 거친 후 서북쪽인 제2구역을 향한다. 이곳은 서오릉(사적198호), 서삼릉, 온릉, 파주삼릉(공순영릉), 파주장릉, 김포장릉 등 14개 릉이 분포되어 있다. 제일 먼저 5개 릉이 모여 있는 서오릉으로 향한다. 서오릉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에 있지만 서울의 서북지역과 매우 가까워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에 있는 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서오릉은 세조의 맏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요절하자 풍수지리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곳을 세조가 친히 거동하여 경릉의 능지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릉 이후 이곳에는 덕종의 아우 예종과 안순왕후가 묻힌 창릉이 조성되고 200여년 뒤 조선의 ..

조선 왕릉 답사 (21) : 북한 왕릉

https://youtu.be/m9QOgnG1dwc 조선왕릉은 모두 42기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다. 이는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조선왕릉의 완결을 위해 제릉과 후릉도 다룬다. 그러나 끄새는 아래 설명하는 제릉과 후릉을 직접 답사하지 못하였다. 아쉽지만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유물도감』과 『문화유산 왕릉』,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 계보』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참조하였음을 적는다. 〇 제릉 태조에게는 2명의 정부인이 있는데 첫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둘째는 신덕왕후 강씨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사망하였으므로 후에 왕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는 안변 사람 한경의 딸이다. 한경은 함경도의 요충지인 안변의 ..

조선 왕릉 답사 (20) : 제1구역 광릉(2)

https://youtu.be/AFMza3zivgM 광릉은 조선왕릉 중 남다른 것이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입구로 들어가면 다소 이색적인 석비가 보인다. 하마비다.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을 한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조선왕릉동부지구 광릉관리소 경대수 선생은 다른 왕릉에도 하마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재는 광릉에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광릉의 배치를 보면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동원이강 형식은 광릉이 최초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 형식이지만 광릉의 조영 시기가 앞선다. 그런데 능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이 하나라는데 다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각 릉마다 정자각을 하나씩 세우면 문제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