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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94) : 파라오의 저주(5)

https://youtu.be/EYVNqr9UubI ④ 투탕카문의 미라 파라오 저주의 주인공은 사실상 투탕카문의 미라다. 투탕카문의 미라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파라오의 저주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도 투탕카문 미라의 중요성을 알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미라와 미라의 부장품에 관련한 내용에 할애했다. 관 속의 투탕카문 미라는 약간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있었는데, 이는 미라를 관에 안장할 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라는 동서 방향으로 누워있는데, 머리가 서쪽을 향해 있다. 하지만 카터가 미라를 황금관에서 떼어낼 때 고온의 열을 사용하는 등 매우 고생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장례용 연고를 부어 딱딱하게 접착되었기 때문이다. 시체를 감싼 방식은 정통 미라를 제작하는 ..

피라미드(93) : 파라오의 저주(4)

https://youtu.be/hDMsD0yETs4 ② 황금관 카터는 석관 속의 내용물들이 고운 수의들로 싸여 있어 처음에는 상당히 실망했다. 그러나 수의를 하나하나 풀자 눈부신 광경이 나타났다. 석관 내부 전체를 가득채운 투탕카문의 황금빛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금관의 길이는 2.1미터로 오시리스 형상의 관 뚜껑이 덮여있었는데 그것을 열자 안에 두 개의 속관이 있었다. 그리고 맨 안쪽 속관은 날개 달린 이시스와 네프티스 여신이 몸체를 감싸고 있었다. 왕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금판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두 손은 가슴 위에서 구부러진 지팡이와 도리깨를 들고 있었다. 두 눈은 화산암맥과 접촉해 변질된 석탄인 ‘선석’과 흑요석으로 만들었고 눈썹과 눈꺼풀은 청금석상감으로 장식했다. 인체형상 관에서 깃털 문..

피라미드(92) : 파라오의 저주(3)

https://youtu.be/7Eb4TXtX9Gw 카르나본 경은 카터의 전보를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겠다는 답신을 보냈고, 11월 23일 증기선을 타고 도착했다. 11월 26일 카터는 카르나본과 카르나본 경의 딸인 에블린 등과 인부들을 뒤에 세워둔 채 문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불을 비추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훗날 카터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구의 아랫부분을 막고 있는 돌무더기가 천천히 치워졌다. 지켜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속도가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마침내 장애물이 제거되고 문 전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온 것으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왼쪽 상단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 틈으로 들여다보니 안은 캄캄했고 탐침을 아무..

피라미드(91) : 파라오의 저주(2)

https://youtu.be/WhNEoaHglhE 카터 또한 자신의 행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발굴 작업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카터는 카르나본에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하자고 권유했다. 사실 카르나본 경도 이런 카터의 제안이 엄청난 도박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발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유럽의 부호로 손꼽히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파산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터와 카르나본 경에게 행운도 따랐는데 때마침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투탕카문 무덤 인근의 발굴권을 이집트 정부에 반납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1914년 발굴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데이비스는..

피라미드(90) : 파라오의 저주(1)

https://youtu.be/cSpU8O95wvs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무덤이 개방되는 것을 가장 기피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저승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19왕조 즉 이집트의 전성기에 사망한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이 현대에 발견되어, 고대이집트를 보다 충실하게 파악하게 만들어 준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지만, 당사자인 파라오에게는 안식을 방해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의 저주란 무덤을 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무덤의 주인공이 그동안 견지한 안식을 저해한 방해꾼에게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사자의 저주를 이집트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투탕카문 파라오는 자료에 따..

피라미드(89) : 이집트를 다시 본다(5)

https://youtu.be/rG0bI8kz4OM 〇 제드(Djed pollar) 제드는 ‘인내’를 뜻하며 미라의 동쪽에 놓였다. 학자들은 제드를 오시리스 부활을 재어하는 의식에서 들어올렸던 나무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자의 서』에서는 제드를 사후세계에서 오시리스를 다시 일어 서게 하는 그의 척추로 언급하고 있다. 〇 네페르툼(Nefertum) 멤피스 지역의 신인 프타(Ptah)와 사크메트(Sakhmet)의 아들인데 이 부적은 이집트의 왕족들이 착용하던 짧은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두 개의 긴 깃털과 연꽃을 이고 있으며 자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인 사자를 딛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부적은 현세와 내세에서 젊은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알려진다. 〇 베스(Bes) 베스는 현세와 내세에서 임산부..

피라미드(88) : 이집트를 다시 본다(4)

https://youtu.be/Qx9Xdbcuth0 〇 고왕국 시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왕국 시대에 비로소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의 주제는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이지만 복합건출물에는 파라오만 매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피라미드건축물은 파라오의 가족과 그의 가신들의 무덤으로 한마디로 파라오를 주위로 한 가족묘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절차에 의한 미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시신은 아마천으로 싸여졌고 때때로 회반죽으로 겉면을 칠하기도 했고 석관이나 나무 관에 안치되었다. 그림을 그린 미라 마스크도 등장했고 카노픽 단지에 장기도 보관했다. 또한 금, 파이앙스로 된 도기, 홍옥수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부적들이..

피라미드(87) : 이집트를 다시 본다(3)

https://youtu.be/9nbKzYE_zRA 미라는 이집트에서 350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정황이 시대에 따라 변하므로 미라 제작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는 이집트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〇 초기왕조 시대 선사시대와 선왕조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주검을 사막에 그대로 매장했다. 그런데 이집트 사막의 특성상 주검이 자연스럽게 보존되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주검이 마스터파와 같은 벽돌로 만든 무덤에 묻히기 시작하자 모래와의 접촉을 통한 자연건조 과정이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주검을 보존하는 방법을 도출했다. 이 과정은 몇 백 년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미라는 무려 기원전 4400년이나 된다..

피라미드(86) : 이집트를 다시 본다(2)

https://youtu.be/QTXhswhsukk 〇 렌(ren, 이름) 이집트인들에게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름이 현세에서 마법같은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범죄자에게 내려진 극형은 처형 전에 이름을 라메수 즉 ‘레가 잉태한 자’에서 마레스쥬 즉 ‘레가 증오하는 자’로 바꾸는 것이다. 죄인이 죽은 뒤에도 바뀐 이름이 계속 그를 저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인에게는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무덤 자체는 물론 곳곳에 이름을 새겼다. 이름표는 물론 미라를 감싼 천 앞부분에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특히 사자의 이름이 살기를 바란다는 문구도 있다. 〇 그림자 이집트인에게 그림자는 육체라는 물리적 형상에서 분리된 부..

피라미드(85) : 이집트를 다시 본다(1)

https://youtu.be/8eukj7FPMLU 고대 이집트에 대해 현대인들이 놀라는 것은 거의 3500년 동안 초지일관하게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 즉 죽어서도 산다는 것이다. 이는 무덤과 장례를 위해 세계 어느 고대문명과도 다른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죽은 후의 생활을 준비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 즉 생존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넣은 물건과 무덤 안에서 거행되는 의식은 모두 무덤의 주인의 성공적인 사후세계의 진입 더 나아가 영원한 삶을 기리기 위한 당연한 절차로 보았다. 한마디로 이집트인들이 3500년이나 되는 장기적인 기간 동안 다른 어떤 문명에서 볼 수 없는 자신들의 신념을 계속 유지했다.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피라미드(84) : 약탈문화재 - 한국 (3)

https://youtu.be/_OO1XDqx1y0 유네스코는 1970년 11월 14일 프랑스 파리의 제1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이 조약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반환과 관련된 조항은 제11조에서 불법적으로 약탈한 문화재에 관한 부분이다. ‘외국 군대에 의한 일국의 점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강제적인 문화재의 반출과 소유권의 양도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 규정을 적용하면 동경대가 보관하고 있는 실록은 명백히 불법으로 약탈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는 조선왕조가 오대산 사고의 관리책임자로 월정사 주지를 임명했다는 사실과 1970년 11월 제16차 총회에서 채택된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반출 및 ..

피라미드(83) : 약탈 문화재 - 한국 (2)

https://youtu.be/dnO-IUiV46g 실록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은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흔히 실록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4대사고 체제’를 든다.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지방 곳곳에 서고를 만들어 각각 보관함으로써 화재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 실록의 제작과 보관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시대의 실록의 제작과 관리는 단순한 서책 제작과 보관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고 발표했다. 사고는 서책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한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고 습기와 화재, 도난 방지를 위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피라미드(82) : 약탈 문화재 - 한국 (1)

https://youtu.be/mCn-Q7tfsWI 과거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현실 속에 다시 나타난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무단 정복, 강제 합병 등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중에 일어났던 수많은 폐해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피식민국의 상황 변화에 따라 적나라하게 표출되는데 그리스 예술에 대한 현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영국 및 프랑스 등이 그리스 문화재를 가져가서 연구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유물이 그 생산국에 남아 있었다면 무지와 무관심속에서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라면서 보다 우수한 연구와 보관 능력을 가진 나라에 잘 보존돼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피식민국들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약탈국들이 이와 같이 ..

피라미드(81)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6)

https://youtu.be/PVwroc3OBeA 나폴레옹의 원정 이후 유럽에서 이집트에 대한 열풍이 일자 이집트 유적에 대한 파괴와 해외 반출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는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정부에도 큰 관련이 있다. 그것은 알리가 온갖 편의를 동원하여 도굴꾼들, 즉 모험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나폴레옹과 전투한 경력도 갖고 있는 터키인으로 1805년에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집트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많은 유럽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기술자들은 모하메드 통치 초기부터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유적을 파손하고 반출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각국의 영사 등 이집트 주재 외교관들이 더욱 앞장섰다. 그들은 외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모..

피라미드(80)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5)

https://youtu.be/1z6q-A5Xs0w 파라오의 무덤을 훼손할 정도의 도굴 행위가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잘 조직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덤을 지키는 관리들로부터 무덤의 비밀을 전해받기도 했다. 한 파피루스에 의하면 도굴꾼의 주범으로 테베 시장을 용의자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 재판 기록에는 아멘호텝 3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의 무덤들도 모두 약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앞에서 람세스 2세 등의 미라가 이리저리 옮겨진 내용도 있다. 특히 람세스 3세의 미라는 도굴꾼들에게 훼손당한 뒤 세 번이나 다시 매장되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이장할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재위 17년, 두 번째 계절 셋째 달 6일, 오시리스 신이신 우세르마레-세..

피라미드(79)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4)

https://youtu.be/IXcT7huqgGA 제18왕조 즉 신왕국 시대부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관행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식의 묘를 지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로 특징되는 묘를 짓기 시작했다. 테베의 맞은편에 자리한 나일 강 서안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왕의 넋을 위로하는 신전을 짓는 동시에 테베 산 바위를 뚫어 각자의 무덤을 축조하는 것이다. 즉 망자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신전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고 무덤은 좀 더 관리가 편리한 피라미드의 기능을 하는 테베 산 밑에 축조하는 것이다. 바로 왕과 왕비의 계곡이다. 이들 계곡은 왕래가 잦은 큰길에서 다소 떨어진 은밀한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초창기에는 비교적 경비하기가 쉬웠다. 왕가의 계곡에 처..

피라미드(78)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3)

https://youtu.be/NuQXXX6svu8 장례식도 도굴꾼들에게는 도굴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데 좋은 기회를 준다. 파라오나 왕비의 무덤들은 경비병이나 신관들이 지켜주므로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의 경우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 시신은 훼손되고 장신구 등이 탈취되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학자들은 많은 미라들이 매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둑들의 손을 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 미라를 매장하는 데 동원되는 인부들은 매장자를 위한 부장품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매장할 때부터 도굴하기 쉽도록 조치할 수 있었다. 또한 도굴꾼들간의 예의 즉 기본 협조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도굴한 무덤에 다른 도굴꾼들이 들어..

피라미드(77)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2)

https://youtu.be/BGCht6ivBQg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파라오의 노력은 초창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왕가의 계곡이 묻혀있던 무덤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권력자가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권층으로서는 자신들의 무덤에 갖고 갈 유물로 과거의 파라오 무덤에 묻혀 있는 물건들을 확보한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태어난 환경과 지위에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이승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만 충실히 하면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 사회에서 어째서 도굴이 끊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한정된 자원 아래서 일반 사람들이 보다 ..

피라미드(76)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1)

youtu.be/OHw58Ygtuf8 이집트에서 도굴은 이집트식 장례문화와 함께 생겨난 이집트의 역사일 정도로 매우 오래되었다. 내세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믿음이 미라를 만들고 많은 재화를 무덤에 투자하도록 했는데, 도굴꾼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먹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해야 했고 또 식량이 부족하거나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여유분을 비축했다. 재산이나 지위를 상속받는 사람들은 보다 유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힘썼다. 좀 더 나은 음식과 술, 주택과 옷 등이라 볼 수 있지만 그들을 항상 감싸고 있는 것은 보다 좋은 장례용품을 모아두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도굴은 무덤이 만들어질 때부터..

피라미드(75) : 스핑크스(4)

youtu.be/6U-xKMoehQY 1995년 11월부터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한 네페르타리 왕비무덤이 이집트 정부와 미국의 게티 재단에 의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한편 네페르타리 왕비의 시아버지 즉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의 무덤도 19세기에 발견되었을 무렵에는 네페르타리 왕비의 벽화와 같은 정도로 비교적 좋은 보존 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무지한 관광객들이 만지기도 하고 또 유적 안에서 내뿜는 수증기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복원 작업을 포기하였다고 알려진다. 유명한 투탕카문 파라오 무덤의 경우도 총 면적이 90제곱미터에 지나지 않는데도 하루 방문객이 최소한 3,000명쯤 되어 이들이 하루에 내뿜는 수증기가 25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