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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11) : 제1구역 동구릉(8)

https://youtu.be/q6qJafZ0w1I 조선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혼례식을 들 수 있다. 왕과 왕세자, 왕세손 등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는 혼례식이 벌어졌고 시대별로 내용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영조 35년 (1759) 즉 66살에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와의 결혼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나이 차이는 51세로 조선왕실의 최고 기록인데 두 사람의 혼례식이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에 상세히 기록되어 250여 년 전의 왕실 혼례 정황을 상세히 알게 해 준다. 왕실에서 혼례식이 있게 되면 먼저 총괄본부인 ‘가례도감’이 구성되어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 부책임자인 도제는 판서급에서 임명했다. 도제 3인 중 2인은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인데 의식절차에 대한 ..

조선 왕릉 답사 (10) : 제1구역 동구릉(7)

https://youtu.be/gtfh13Fj0Vo ⑤ 원릉 원릉은 조선 왕조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영조(1694〜1776)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1805)의 능이다. 1699년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해지고 1704년에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린 후 1712년에 궁궐을 나가 살게 되자 숙종은 연잉군의 집에 ‘양성(養性)’이란 당호를 하사했다. 영조는 영명한 군주로 기록되는데 즉위 이전 18세 때부터 왕세제로 책봉된 28세까지 약 10년간 궁궐 밖에서 생활을 하여 서민적이고 절검하는 생활 습성이 배어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왕 중에서 남다르게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의 고민을 해소시키는데 누구보다 앞장 선 것은 이 때문으로 본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며 경종의..

조선 왕릉 답사 (9) : 제1구역 동구릉(6)

https://youtu.be/QoJwxyfbtVo ④ 숭릉 : 제18대 현종(1641〜1674) 및 명성왕후 김씨(1642〜1683)의 능이다. 숭릉은 동구릉 안에 있는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 했다. 동구릉 9개 중 입구에서 볼 때 가장 좌측에 있는데 숭릉 안내판에서 왕릉까지 적어도 10〜15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이 정도의 발품을 팔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하였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164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그의 나이 1..

조선 왕릉 답사(8) : 제1구역 동구릉(5)

https://youtu.be/rgiGI23nOjs ③ 목릉 조선왕조에서 파란만장한 생으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목릉은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능으로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제일 좌측이 선조의 능이고, 중앙 의인왕후, 우측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릉을 목릉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고 이황 등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목릉성세’라고 불려지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 인달방 사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하성군에 책봉되었는데 명종의 후사가 없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567년 명종이 사망하자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

조선 왕릉 답사 (7) : 제1구역 동구릉(4)

https://youtu.be/AbXsIgNIvwg ② 현릉 현릉은 제5대 문종(1414〜1452) 및 현덕왕후 권씨(1418〜1441)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현왕후 심씨다. 세종 3년(1421) 8살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37년부터 세종을 대신하여 서무를 결재했으며 막상 왕위에 오른 것은 1450년으로 그의 나이 37세였다. 세종은 1442년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를 받게 했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

조선 왕릉 답사 (6) : 제1구역 동구릉(3)

https://youtu.be/sipvj1UB0v8 이성계가 이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선왕조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위야 어떻든 조선 개창은 이성계였지 이방원이 아니었으므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는 빌미였다. 더구나 이성계는 태종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태종은 이성계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방법론은 단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흥에 은거해 있는 태조를 자신이 있는 수도로 모셔오는 길이다. 그러나 태상왕인 이성계를 강제로 납치해 올수는 없으므로 태조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을 함흥으로 보내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긴다. 태종은 함..

조선 왕릉 답사 (5) : 제1구역 동구릉(2)

https://youtu.be/XPwBTRroyO4 고려말 이성계의 활약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화려하다. 공민왕 10년(1361),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는데 같은 달 압록강이 완전히 얼음으로 바뀌자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기병으로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력적이었는데 잘 알려진 이야기는 이성계가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명이다. 다음해에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고려에서 이..

조선 왕릉 답사 (4) : 제1구역 동구릉(1)

https://youtu.be/BMPyMc2DS8M 제1구역은 대체로 서울시 동북쪽에 있는 동구릉, 홍유릉, 사릉, 광릉을 포함하여 13개의 능이 있다. 이중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왕조 42개의 릉의 거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른 곳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儉岩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9개의 능에 17위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조선 왕조의 가장 큰 가족묘로 총 면적 579,557평이나 된다. 1408년,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능지가 정해진 곳이지만 이후 16명이나 되는 유택이 추가되었으므로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볼 수 있다. 동구릉의 자리에 대해서는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

조선 왕릉 답사 (3) : 들어가기(3)

https://youtu.be/DrYSZXxg1Tk 능침까지 올라가는 능역은 기본적으로 잔디(왕릉에서는 사초(莎草)라고 함)로 조성한다. 정자각 뒤쪽으로 작은 동산 모양의 사초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라 부르는 긴 돌들이 단을 지어 놓여 있고 가장 높은 상계에 능의 주인이 영면한 봉분이 자리한다. 능의 높이는 10자〜15자, 광중(壙中) 깊이 10자. 너비 29자, 길이 25자5치이고 지름 20자〜30자이며 능상 모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룬다. 반구형은 살림집의 지붕을 모방한 것이고 광중은 살림방을 모방한 것이라 하여 지하궁전을 의미한 현궁(玄宮)이라 부른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의 묘소는 음택(陰宅) 또는 유택(幽宅)이라 한다. 지석(誌石..

조선 왕릉 답사 (2) : 들어가기(2)

https://youtu.be/mh9uH4FwPeQ 끄새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의 왕릉을 가능한 한 자주 방문하라고 추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건강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등산을 하는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등산복을 입고 조그마한 산등성이라도 걸으며 자랑스러워하며 특히 산림이 우거진 곳을 주파한 후에는 삼림욕으로 건강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다. 삼림욕이라면 왕릉이야말로 적소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왕릉은 천하의 명당 자리 즉 길지를 엄선하여 조성한다. 이와 같이 명당 자리를 찾는 것은 기(氣)가 충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사를 보면 수많은 천장(遷葬)을 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능침이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붕당 간의 정..

조선 왕릉 답사 (1) : 들어가기(1)

https://youtu.be/KT0gHNb9SE4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2009년 6월 동구릉·광릉·태릉 등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한국의 조선왕릉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42릉이나 되는 것은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한 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근본적인 요인은 왕릉이 단순한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라 조선시대(1392〜191..

한국의 궁궐 : 창경궁(4)

https://youtu.be/_6UZX_2eoFw ⑬ 영춘헌(迎春軒) 양화당 동쪽 너럭바위 너머에는 창경궁 내전 건물로 행랑으로 둘러싸인 영춘헌(迎春軒)과 영춘헌의 서행각인 집복헌(集福軒)이 있다. 건립 연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동궐도』에 의하면 순조30년(1830) 환경전, 경춘전과 함께 소실된 것을 순조 34년(1834) 현재 낙선재 뒤편 언덕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영춘헌을 재건했다고 적었다. 재건하면서 과거와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⑭ 집복헌(集福軒) 집복헌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거처다. 『동궐도』에 의하면 이때의 모습은 영춘헌의 북서쪽에 위치했다. 중앙에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심 건물 뒤쪽으로..

한국의 궁궐 : 창경궁(3)

https://youtu.be/PEN-kpXJQIw ⑤ 문정전(文政殿) 명정전을 돌아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잠시 난감해한다. 이유는 명정전을 등진 남향한 문정전과 그 옆 경사진 터에 동향한 숭문당의 전각이 작은 공간에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명정전 왼쪽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물은 문정전이다. 왕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창경궁의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정전과 나란히 동향을 할 경우 한 궁궐에 정전이 둘이 되어 옛 제도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사각기둥을 사용해 정전과 격을 달리하였다. 1484년, 성종이 창경궁을 크게 확장할 때 건립되었는데 ..

한국의 궁궐 : 창경궁(2)

https://youtu.be/dihyVt1ANHs ① 홍화문(弘化門, 보물 384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담장 좌우에 십자각을 두었으며,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탄 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계 우진각 지붕이다. 홍화문의 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이층의 루(樓)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영조 25년(1749) 임금이 세자와 함께 홍화문의 루에 올라가 빈민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보물 제384호인 이 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이 남향인 것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홍화문은 성종 15년(1484)에..

한국의 궁궐 : 창경궁(1)

https://youtu.be/qCFeUotvdYg 창경궁은 서울의 동쪽 응봉 자락에 위치하면서, 인접한 창덕궁(昌德宮)과 함께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현존하는 국내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1419년에 지었고,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인 수강궁(壽康宮) 터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다. 성종13년(1482) 창덕궁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수강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성종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처소로 삼으려는 뜻이다. 이는 성종 10년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자신이 수강궁으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8)

https://youtu.be/Rn-tVonB3PY ⑪ 궐내각사 대부분의 관청은 궁궐 바깥에 있는 것이 기본이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부른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궐내각사는 담장과 담장이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7)

https://youtu.be/2ZvmAtr1U8U ⑨ 경훈각 대조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면 내부의 벽면을 타일로 마감한 이상야릇한 건물과 마주친다. 궁궐의 건물 양식과는 다른 이 건물은 1917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중건할 때 서양식으로 개조하여 수라간(水刺間), 즉 주방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대조전 뒤, 서북쪽으로 돌아나가면 경훈각(景薰閣)이다. 세조 때 건물의 명칭을 바꾸면서 당시에는 아래층을 광세전(曠世殿), 위층을 징광루(澄光樓)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고, 순조 33년(1833)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다. 경훈각은 선조가 명나라에서 받은 곤룡포와 비슷한 관복인 망의(妄衣)를 보관하던 ..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6)

https://youtu.be/Mse8XVDoiTM ⑦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5칸의 55칸 건물인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과 선정전의 동편에 놓여 있으며 북쪽으로 대조전이 있다. 창덕궁 안에 있는 침전(沈澱)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왕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의 편전은 본래 선정전이었으며 희정당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왕이 대대로 집무를 하는 통에 편전으로 바뀐 것이다. 순조 30년 5월에는 후에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경복궁 희정당의 명칭을 살펴보면 『궁궐지』에 순조가 지은 '희정당명(熙政堂名)'을 소개하면서 ‘군주가 밝고 강하면 정사가 잘 다스려..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5)

https://youtu.be/O7JkGIKR46E ⑥ 선정전(宣政殿 : 보물 제814호)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에서 매우 큰 중요도를 갖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선정전은 외전(外殿)에 속하는 편전(便殿)으로 편전이란 왕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던 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과 같이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점에서 특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의하면 성종 2년(1417) 가을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성종 8년(1477) 3월에 왕비가 첫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 선정전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문신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명종 8년(15..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4)

https://youtu.be/aT-TuD-qyLs 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인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전이 보이며 정전 앞 마당을 좌우로 동서 행각(行閣)을 감싸고 있다.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조(朝)’로,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조정(朝廷)이다. 당연히 품계석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인정문 쪽에서 9품이라 쓴 글씨부터 인정문 쪽으로 정1품, 종1품까지 써 있다. 왕이 참석하는 조회 때 문관과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정렬하던 곳이다. 동쪽이 문관, 서쪽에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마주 본다. 물론 조정에서 조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회나 과거 시험 등도 이곳에서 치렀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운 건물로, 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