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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31) : 제2구역 서오릉(10)

https://youtu.be/rRPDlznpP1w 학자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약을 제조했다고 추정한다. 사실 한약재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극물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상이나 수은처럼 확실한 즉효성 독약이 있는 반면 부자, 초오, 천오두, 천남성 등도 즉효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행인, 마황, 반하, 파두 등도 후보자다. 일부 학자들은 구하기 힘든 것을 사용하기보다는 비상이나 초오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가장 큰 의문은 정말로 급사하느냐인데 자료에 의하면 천차만별이다. 상당한 량을 복용하고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사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 보면 바로 즉사하게 만드는 극약계열보다는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태의 약이 많았을 것으..

조선 왕릉 답사 (30) : 제2구역 서오릉(9)

https://youtu.be/fLxJcEDHYhI 학자들에 따라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사약을 거론한다. 조선사 전체를 통해 사약처럼 많은 이야기를 만든 소재가 없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약처럼 모순적인 것은 없다. 약이란 사람을 치유하는 것인데 사약은 이와 반대로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한 약이다. 그것도 조선조에서 왕이 직접 명령하여 집행한 것이다. 독약은 다른 문명권에서 흔히 암살할 때 사용했는데 조선에서는 독약을 중앙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집행하는 사형에 사용했다는데 특이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는 교형, 참형, 능지처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교형은 죄인의 목을 매서 죽게 하는 소위 교수형이고 참형은 이보다 무거운 형벌로 목을 베었다. ..

조선 왕릉 답사 (29) : 제2구역 서오릉(8)

https://youtu.be/XcvucqDcRC0 윤씨가 폐비되자 그야말로 진행된 내용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당시 둘째 대군을 낳은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손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결국 5일 뒤 사망한다. 그런데도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이후 윤씨가 사사되는데 대부분의 사극 등을 보면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대의 정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학자들은 성종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한다.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

조선 왕릉 답사 (28) : 제2구역 서오릉(7)

https://youtu.be/TzpMrdIaqyY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의 며느리인 윤비(尹妃)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은 적장자인 연산군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인수대비와 윤비는 물과 기름사이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대비는 남다른 지식인이지만 윤비(尹妃)는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조선 왕릉 답사 (27) : 제2구역 서오릉(6)

https://youtu.be/d28N3Nl6sKs ② 경릉 경릉은 추존왕 덕종(1438〜1457) 및 소혜왕후 한씨 즉 성종의 모친(1437〜1504)의 묘이다. 덕종은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의경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사망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지만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정난공신1등에 오른 한확의 딸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 즉 인수대비가 되었다. 각종 드라마에서 단골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수대비가 바로 소혜왕후다. 세조3년(1457) 본래 병약했던 남편이 사망하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였다..

조선 왕릉 답사 (26) : 제2구역 서오릉(5)

https://youtu.be/G7E_xCUpo_c 다소 정리하여 설명하면 장희빈 사건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지지자들이 두 왕비를 둘러싸고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우선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 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거세게 벌였다. 여기에서 숙종의 처신이 중요한 변수인데 놀랍게도 숙종이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고 숙종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장희빈을 재단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한마디로 숙종이 서인들의 권력에 의심을 가지면서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 세력을 우대했으나 권세를 잡은 남인들도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권력을 행사하자 이를 제거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조선 왕릉 답사 (25) : 제2구역 서오릉(4)

https://youtu.be/ahVwjZadjpA 조선조에서 내용은 어떻든 중전 폐출에 대한 민심이 나빠질수 밖에 없는데 숙종은 이를 숙종답게 처리했다. 인현왕후가 쫒겨난 지 5년 만인 1694년 숙종은 대대적인 정계개편에 돌입한 것이다. 숙종은 조선의 권력이 또 하나의 붕당에 의해 잠식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특유의 국면 전환카드를 준비한 것이다. 우선 자신이 본의 아니게 인현왕후를 쫓아내었다며 철저하게 오리발내밀었다. 한마디로 인현왕후를 몰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들을 퇴출시키고 그녀를 지키려다 화를 당한 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사전 정치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사랑을 표명했다. 한마디로 왕으로서 신망이 떨어진..

조선 왕릉 답사 (24) : 제2구역 서오릉(3)

https://youtu.be/DSjBQu7JFCA 숙종의 반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689년 1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겠다고 밝힌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아들이 태어난 지 단 4개월 후다. 원자는 상속권, 즉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다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서인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서인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앞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조선 왕릉 답사 (23) : 제2구역 서오릉(2)

https://youtu.be/u5Es37SpIyI 장희빈은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가장 논쟁이 뜨거운데 이는 그처럼 다룰 수 있는 많은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쟁적인 인물은 진면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과장과 포장이 난무하며 더불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조선 숙종 때에 펼쳐진 격렬한 당쟁 한복판에 있었다. 당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이 핵심인데 특히 서인, 그 가운데서도 노론은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그들의 큰 스승 송시열 등이 장희빈의 왕비 책봉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 김향은 『악녀의 세계사』에서 역사적으로 악녀라 불리는 42명을 ..

조선 왕릉 답사 (22) : 제2구역 서오릉(1)

https://youtu.be/FFKmP-GSuZ4 조선왕릉의 제1구역인 서울시 동북쪽을 거친 후 서북쪽인 제2구역을 향한다. 이곳은 서오릉(사적198호), 서삼릉, 온릉, 파주삼릉(공순영릉), 파주장릉, 김포장릉 등 14개 릉이 분포되어 있다. 제일 먼저 5개 릉이 모여 있는 서오릉으로 향한다. 서오릉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에 있지만 서울의 서북지역과 매우 가까워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에 있는 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서오릉은 세조의 맏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요절하자 풍수지리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곳을 세조가 친히 거동하여 경릉의 능지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릉 이후 이곳에는 덕종의 아우 예종과 안순왕후가 묻힌 창릉이 조성되고 200여년 뒤 조선의 ..

조선 왕릉 답사 (21) : 북한 왕릉

https://youtu.be/m9QOgnG1dwc 조선왕릉은 모두 42기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다. 이는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조선왕릉의 완결을 위해 제릉과 후릉도 다룬다. 그러나 끄새는 아래 설명하는 제릉과 후릉을 직접 답사하지 못하였다. 아쉽지만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유물도감』과 『문화유산 왕릉』,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 계보』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참조하였음을 적는다. 〇 제릉 태조에게는 2명의 정부인이 있는데 첫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둘째는 신덕왕후 강씨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사망하였으므로 후에 왕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는 안변 사람 한경의 딸이다. 한경은 함경도의 요충지인 안변의 ..

조선 왕릉 답사 (20) : 제1구역 광릉(2)

https://youtu.be/AFMza3zivgM 광릉은 조선왕릉 중 남다른 것이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입구로 들어가면 다소 이색적인 석비가 보인다. 하마비다.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을 한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조선왕릉동부지구 광릉관리소 경대수 선생은 다른 왕릉에도 하마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재는 광릉에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광릉의 배치를 보면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동원이강 형식은 광릉이 최초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 형식이지만 광릉의 조영 시기가 앞선다. 그런데 능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이 하나라는데 다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각 릉마다 정자각을 하나씩 세우면 문제가 없는..

조선 왕릉 답사 (19) : 제1구역 광릉(1)

https://youtu.be/QLg_uJ1-R6g 주엽산 자락에 있는 광릉(사적 197호)은 조선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의 능으로 면적만 무려 249만 4,800제곱미터나 달한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광릉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광릉 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식물 865종, 곤충 3,925종, 조류 175종 등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여기엔 흰진달래 등 광릉 숲 특산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이 포함돼 있다. 단위 면적당 식물 종 수는 광릉 숲이 헥타르(㏊)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조선 왕릉 답사 (18) : 제1구역 사릉

https://youtu.be/YhGLgVZv2yE 홍유릉 인근에 있는 사릉(사적 209호)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능이다. 사릉은 왕릉보다도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으로 보다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었으나 방문객이 없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 1월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들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문화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곳에 있는 어린 소나무 묘목들은 강원도 삼척의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

조선 왕릉 답사 (17) : 제1구역 홍유릉(2)

https://youtu.be/fcVRnNArWVQ ② 유릉(裕陵) 조선왕조 마지막 왕릉인 제27대 순종(1874〜1926) 및 순명황후 민씨(1872〜1904), 순정황후 윤씨(1894〜1966)의 유릉도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광무원년(1897)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됐다. 1907년 황제로 즉위했지만 일본의 꼭두각시로 변한 친일파들에 의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다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조약 조인을 거쳤는데 문제는 황제인(옥쇄)의 날인이다. 순정황후 윤씨(1894〜1966)가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

조선 왕릉 답사 (16) : 제1구역 홍유릉(1)

https://youtu.be/wPrIaQn6ZpY 조선왕릉 중에서 남다른 격식을 갖고 있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 사적 207호)이다. 제26대 고종(1852〜1919) 및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홍릉(洪陵)과 제27대 순종(1874〜1926) 및 순명황후 민씨(1872〜1904), 순정황후 윤씨(1894〜1966)의 유릉(裕陵)이다. 이는 당대의 품격이 조선의 왕이 아니라 황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중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황제(皇帝)’가 있었는데 우선 고종과 순종이 황제였고 더불어 무려 8명이 황제다. 이들 8명은 추존된 황제로 생전에 왕위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사후..

조선 왕릉 답사 (15) : 제1구역 동구릉(12)

https://youtu.be/dOc8l2e9ztI ⑨ 수릉 동구릉 중앙 길을 따라 건원릉 방향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릉이 수릉으로 추존 익종(문조, 1809〜1830) 및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능이다. 일반인들은 익종과 신정왕후의 무덤이라고 하면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조선 왕실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조대비(趙大妃)’라고 하면 기억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케 한 당사자가 바로 조대비 신정왕후다. 문조는 4살부터 왕세자(효명세자)로 책봉되고 19살부터 대리청정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순조의 뒤를 이어 문조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헌종은 부왕인 문..

조선 왕릉 답사 (14) : 제1구역 동구릉(11)

https://youtu.be/JnCY5pfVLBk ⑧ 경릉 : 경릉은 제24대 헌종(1827〜1849) 및 효현왕후 김씨(1828〜1843), 계비 효정왕후 홍씨(1831〜1904)를 모신 동구릉 중 아홉번째 능이다. 능이 조성된 순서로 따지면 수릉이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재위 순으로 꼽으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헌종은 익종으로 추존된 문조와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황후의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왕가의 정통성을 한 몸에 안고 태어났으며 4세에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급서하여 바로 왕세손에 책봉되면서 6세부터 강연(講筵)을 열어 왕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8살 때에 할아버지인 순조가 사망하여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헌종은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인물이기도..

조선 왕릉 답사 (13) : 제1구역 동구릉(10)

https://youtu.be/Rz_yeBhRF2c ⑥ 휘릉 : 휘릉은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1624〜1688) 능이다.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셋째 딸로 인조의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 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벌어진 당쟁사의 중심에 위치한 사람이 바로 장열왕후다. 이는 어린 나이에 인조와 결혼하였는데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고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증손자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14년을 더 살아 숙종 14년(1688)에 사망했는데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

조선 왕릉 답사 (12) : 제1구역 동구릉(9)

https://youtu.be/FfgCGHfvXLY 왕실의 혼례인 가례(嘉禮)는 의식 절차와 진행을 의궤(儀軌)로 기록하였는데,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가례 의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는 20여 건이 된다. 왕의 혼례식을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가례는 좁게는 관례나 혼례를 의미하는데 왕가에서는 왕의 등극이나 왕세자, 세손 등의 책봉 의식 또는 대비나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도 모두 가례라 한다. 관례는 성인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개 일반인은 20세에 올리지만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며 혼례를 치르기 전에 행하는 의식으로 변했다. 조선시대에 왕가의 혼례는 근본적으로 유교식이다. 유교의 혼례는 육례(六禮)라 하는데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