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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0)

youtu.be/BKwwepbHSlY 플라톤의 이야기와 미노아 문명을 연결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크레타 섬을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고 연대도 지나치게 늦다. 또한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 코끼리가 있다고 했는데 크레타 섬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는다. 마리나토스는 아틀란티스와 크레타의 연결고리로 기원전 15세기경(기원전 1477년으로 추정) 크레타에서 16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산토리 섬(고대에는 테라 섬)에서 갑자기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거론된다. 미국의 과학자 드라고슬라브 닌코비치는 1883년 8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의 화산 폭발과 산토리 섬의 경우를 비교 연구했다. 크라카타우 섬에서 화산이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9)

youtu.be/iM5N_WfIqpk 아틀란티스가 워낙 매력적이므로 후보지들은 계속 등장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에 '도거랜드(Doggerland)'라고 불리는 바닷속의 높은 평지와 같은 지형이 있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신석기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는 육지로 이어져, 현재의 아일랜드부터 브리튼 섬과 프랑스,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가 거대한 반도의 형태로 있었는데 이를 도거랜드라 부른다. 학자들은 도거랜드가 대체로 기원전 18000년부터 5500년까지 존재했다고 인식하는데 실제로 이들 지역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어 과거에 이 지역에 존재한 문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곳이 바로 아틀란티스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이들 지역의 해수면이 높아져 완전히 수몰되었기 때문..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8)

youtu.be/lunqIeEkz5Y 고고학, 천문학, 지질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증거를 끌어낸 핸콕과 플렘-아스 부부의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들은 이집트인이 뛰어난 항해술을 통해 남극까지 항해했을 거라는 개연성까지 부여했다. 하지만 정통 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에 즉각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남극 문명이 남긴 유적의 건설 연대가 1만 2000년을 상회한다면 왜 그들의 후손이 세웠다는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적어도 이들을 연결하려면 이러한 공백기를 말끔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플렘-아스 부부는 아틀란티스인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데 나름대로 시간이 걸렸고,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된 문명이 발전할 수 있다고 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7)

youtu.be/I9ZB20N2DcQ 1만 5,000년 전 남극 대륙은 얼음으로 덮인 황무지가 아니라 초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초고대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토목과 천문학, 항해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이들은 지구 전역을 탐험하며 이집트, 아메리카, 유럽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약 1만 년 전 대재앙이 일어나 남극 대륙에 있던 위대한 문명은 지금처럼 두꺼운 얼음과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남극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고대문명이 멸망할 것을 예측해 사전에 각지로 분산되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선 지식을 보유했던 후예들이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6)

youtu.be/N02JdJgenFM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케이시의 예언이 매력적으로 다가간 이유는 그동안 많은 학자가 아틀란티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장했던 질문을 말끔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1만 2,000년 전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했다면 그들 문명의 잔재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거석문화를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는 현대인이 보기에 거석 문명이 낙후된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을 만들 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아틀란티스인이 석기시대로 퇴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리가 대두될 수도 있다. 첫째, 문명의 퇴행이 이루어졌다. 재난을 피해 신천지로 이동한 아틀란티스인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5)

youtu.be/3S0uTDS_rn4 베게너의 대륙이동설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사망선고가 내려질 즈음, 갑자기 구세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예언가인 에드거 케이시가 아틀란티스의 존재는 물론 위치까지 정확하게 예언했던 것이다. 1877년, 켄터키 주 홉킨스빌에서 태어나 1945년에 사망한 에드거 케이시는 플라톤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초능력으로 아틀란티스 대륙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43년간 8,000명 이상과 정신감응(투시)을 통해 대화한 내용을 1만 4,000개 이상의 문서화된 속기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리딩(Readings)’이라고 부르는데, 진술 중 많은 부분이 아틀란티스 대륙 및 아틀란티스인의 전생, 아틀란티스에서 사용된 첨단..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4)

youtu.be/YHwrp9wNEHQ 〈레무리아 대륙의 실존설을 없앤 판구조론〉 이전의 설명들은 대륙이 이동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딱딱하기 짝이 없는 지구의 대륙이 이동한다는 생각을 떠 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에서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배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학적 정설을 뒤집고 지각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방법을 최초로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인 사람이 베게너다. 그런데 그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비과학자로 거명될 만큼 당대에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베게너는 대륙이 지구의 둘레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지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모순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3)

youtu.be/gDdZuZLqzwQ 아틀란티스 대륙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가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원래 ‘사라진 대륙’이란 말은 아틀란티스 대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질학의 발전 과정에서 학문적인 연구로부터 나온 말이다. 17세기만 해도 사람들은 모든 물질은 생명력이 있어서 생동한다는 물활론(物活論)을 믿었다. 심지어 땅에서 나오는 돌멩이조차 생물처럼 스스로 자란다고 생각했고, 광산에서 금을 캐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광산을 폐쇄하고 금이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당시 학자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도처에서 발굴되는 화석이었다. 산 정상에서 조개나 물고기 화석이 나오는가 하면 인간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도 화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화석이 ‘생물의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2)

youtu.be/HdFSdXWpcdw 슐리만의 트로이 발견과 에반스의 크레타 문명 발굴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미국의 정치인 이그나티스 도넬리(Ignatius Donnelly, 1831~1901년)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스물여덟 살에 미네소타 주의 부지사로 당선될 만큼 정치적 역량이 있던 도넬리는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의회에 소장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그는 '위대한 암호'라는 책에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저술한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세상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저서 '노아의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가 지..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

youtu.be/oUQVTCz256Y 사라진 문명이란 말은 지금껏 쌓아 놓은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단어를 놓고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인간들이 고도의 생산력을 배경으로 만든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들은 무의미하게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혜와 노력을 가해 살아가는 문명이라는 양식을 만들어 가는데 이는 인간만이 가진 특권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질병, 기후의 변화, 식량의 결핍 등으로 기존에 유지되던 생활 모두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적어도 문명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살아있던 대지는 남아있고 그들의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8) : 갑골문자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ftzd5ofIKm0 한민족(동이)과 중국인(화이)의 차별성(18) : 언어체계 마지막은 그림 빌리기이다. 그림 빌리기는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는 다소 추상적인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즉 그림 그리기 대상처럼 묘사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림 합치기처럼 연속적이고 논리적인 합성이 가능하지도 않은 경우, 그려져 있는 그림을 빌려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숫자 만(萬)의 갑골문은 상당히 의외인데 이는 숫자와 전갈의 관계를 연결지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의미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갈류의 그림을 빌어 숫자 일만을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만들어진 ‘만’자라는 글자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는데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7) : 복골 및 갑골문자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jhUeTwo5R_k 22. 복골(卜骨 , 갑골) 동이족이 중국 문명사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다대한데 그 중에서도 한자를 발명했다는 점이다. 동이족이 한자를 발명했다고 하니까 한국인이 한자를 발명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한자의 발명자가 화하족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동물의 견갑골(肩胛骨, 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불에 구워 점을 치는 골복(骨卜, 갑골점)은 동이족의 전유물이다. 복골은 기원전 5,200년 전의 부하문화에서 처음 발견된 후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중원으로 내려간 상(은)에서 골복이 유행한다. 그러나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배하면서 골복의 전통은 사라지지만 동이족의 전통이 강한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6) : 맥궁및 파르티안기사법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STX2-HLm35o 각궁에도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물소 뿔을 접착한 어교는 비가 오거나 기후가 습해지면 물을 먹어 녹아 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습할 때는 각궁을 사용할 수 없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는 활을 따뜻한 온돌방에 넣어서 보관해야 했다. 더구나 각궁은 제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각궁 하나를 완성하는 데 최소한 5년 이상이나 걸린다. 그럼에도 고구려 등 승마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기마병들이 이 같은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하고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흉노(훈) 등 경기병이 사용하는 활은 매우 작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5) : 각배와 각궁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z7ixRJsG7Sg 18. 철제갑주(鐵製甲冑)와 승마용마갑(乘馬用馬甲) 기마민족이 마구를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의 천마총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안장틀이 4점, 안장깔개 1점, 등자 5개,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 3 점 등이 발견되었다. 안장틀에는 거북등무늬(龜甲文)로 구획된 투각 금동제 장식을 안장틀(磯) 상부에 붙이고 그 아래(海)에 띠고리(버클)을 좌우로 한 개씩 붙여놓았다. 안장틀 안쪽에는 줄무늬를 넣어서 짠 비단이 발라져 있어 왕의 안장답게 호화롭다. 안장틀 앞가리개 표면에 붙여진 금동 투각 금구 모든 면에 금제 달개를 달았다. 이들 안장들은 당시의 중국제 안장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다르다. 신라 것에는 북..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4) : 상투와 개마무사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eLNAATslKdE 16. 상투(옥고) 홍산문화에서 학자들을 놀라게하는 것은 적석총에서 상투 옥고(상투머리를 덮었던 옥으로 만든 머리덮개)가 계속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홍산 문화에서 발견되는 상투옥고는 약간 변형된 원통형으로 하부와 상부가 뚫어져 있는데 무덤 주인의 머리에 놓여져 있다. 상투 옥고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상투 즉 머리를 틀어 올리는 관습은 한민족의 고유한 머리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상투 머리를 덮은 옥고와 같은 유물은 중국 황하문명에는 없지만 이후 고조선 시대 이래 한반도와 만주에서 널리 사용한 모자 양식이며 멀리 고구려와 백제, 신라 금관 안에 쓰는 속관 형태로 이어진다. 당대의..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3) : 편두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tdScZ12F1xI 15. 편두 1976년에 발견되어 모두 4차에 걸쳐 180여 기의 무덤이 발굴된 4세기경의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분묘의 규모로 보아 최상위 계층이 아닌 일반 서민 계층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예안리는 현재 낙동강 삼각주의 북부에 해당하지만 옛날 지형으로 보면 고김해만(古金海灣)의 하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190여 평의 좁은 면적에 상하로 4겹 정도 중복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무덤 속에 1구, 많게는 10여 구의 인골이 남아 있었다. 부장품인 1000여 점의 토기를 비롯해 총 2000여 점의 유물도 나왔다.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예안리 인골은 수적으로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지만 더욱 학자들의 눈길을 ..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2) : 동복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JmvAtyV6lBY 14. 북방 기마민족의 상징 동복 홍산 문화 초기는 기온이 농사에 적합하였지만 후대 즉 하가점 상층문화 때부터 기후가 바뀌어 돼지가 발견되지 않고 양, 염소들이 발견된다. 이는 기후변화로 농경지가 광대한 초원지대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곳에서 기마생활을 기본으로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마로 생업을 유지하던 기마민족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성과 생존법,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말에 갖고 다니는 동복(銅鍑, cup cauldron)이다.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원래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1) : 치성(석성)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kUod9Ocy9hI 12.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고구려는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혈투를 벌렸다. 인구가 적고 자원이 많지 않은 고구려가 자원이 많고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이와 같이 혈투를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중국에 비견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2대 전략이자 전술은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다. 고구려는 200여개소가 넘는 산성을 요충지에 건설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남다른 산성 축조 방법 즉 산성에 치성(雉城 또는 치) 또는 마면((馬面)을 기본으로 건설했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0) : 비파형동검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ZRpN8ZAIfG0 11. 비파형동검 고인돌, 빗살무늬토기는 한민족의 특징으로 설명되는 비파형동검(요령식 동검)으로 더욱 힘을 받는다. 특히 비파형동검이 고인돌의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으로도 과거부터 한민족의 주목을 받았다. 서쪽은 요하를 지나 베이징 근처와 산둥지역, 북쪽은 네이멍구 남부지역과 북만주, 요동반도의 신금현 쌍방, 벽류하 23호, 개주시 패방촌 남단산, 한반도의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수 적량동, 여천 오림동과 봉계동, 고흥 운대리, 승주 우산리, 경북 김천 송죽리, 경남 창원 덕천리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과 동모 등의 청동무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 문화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한국(동이)과 중국(화이)(9) : 고인돌별자리

https://youtu.be/LD6urxLUd54 youtu.be/0uLTQzs2hwU 10. 고인돌별자리(2)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 중의 하나는 천문 현상 관측이다. 천문 현상을 왕권의 존립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3명의 제왕이 있다. 요‧순‧우가 그들인데 그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 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 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하여 완벽한 천문 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 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결국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